하와이 개요 지상의 낙원 하와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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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낙원 하와이


하와이주 [Hawaii]
인구 : 127만 400명(2004)
위치 : 북태평양상
면적 : 1만 6729㎢
북태평양상에 있는 미국의 50번째 주
하와이소개
북태평양의 동쪽에 있는 하와이 제도(별칭 샌드위치 제도)로 구성된 군도로, 지상 최후의 낙원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50번째 주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하와이는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며 ‘알로하 스테이트(Aloha State)’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하와이(Hawaii)라는 단어는 하와이어로는 ‘작은 고향’이라는 뜻이지만 폴리네시아어로는 ‘신이 있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하와이는 약 2천 8백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화산섬으로, 섬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화산 덩어리입니다. 한편 빅 아일랜드(하와이 섬의 다른 말)에 있는 마우나 케아(Mauna Kea) 산은 해저와 해발 높이를 합치면 총 10,203.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됩니다.

하와이 제도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미 본토로부터 약 3,862.5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주도(州都)인 호놀룰루는 지리적으로 북위 21:18:25, 서경 157:51:30에 위치합니다. 하와이 제도는 총 137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요 섬은 니이하우, 오아후, 하와이, 마우이, 몰로카이, 라나이, 카우아이, 카호올라웨 등 8개입니다. 이러한 섬들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총연장 600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져 있습니다. 하와이 주 전체 면적은 16,729제곱 킬로미터로, 제주도 면적의 9배, 남한 면적의 1/6에 이릅니다. 비행소요시간은 서울-호놀룰루가 약 7시간 40분, 호놀룰루-서울이 약 10시간 40분으로, 이 시간 차이는 태평양에 부는 역풍 때문입니다.
한인 미주이민의 역사와 발전
1. 태평양을 건넌 7,226 명의 선구자들
100년전에 한국과 하와이와의 만남, 그만남은 역사적으로나 한국 해외 이민사의 의미로 보나 참으로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하와이 초기 이민을 통해서 한국사람이 태평양을 오가는 새 다리가 놓여졌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동방과 서방 선진국 미국과의 교류가 한 세기 동안 이어져 올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역사상 첫 공식 이민의 땅이 바로 미국이었다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꽃 피울 수 있는 길을 활짝 연 것이며, 지난 한세기 동안 인적, 물적교류를 통해서 두 나라는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가 되었다.

초기이민의 1번지 하와이는 한국독립운동의 요지이다. 태평양상의 낙원인 하와이로의 노동이민으로 시작된 지난 한세기에 걸친 미주 이민사는 한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 유교적 전통에서 대대로 살아온 서민들이 살아온 정든 고향과 가족을 뒤로 하고 신천지를 찾아나선 이민 길은 개화사상의 실천이자 본격적인 한미 교류시대를 열어간 개척자들의 의지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자연이 아름다운 땅이다 각종 특산물이 풍요로우며 그 중 사탕수수는 오랫동안 제일의 수입원이기도 했다.사탕수수는 야생으로 하와이의 각섬에서 자라났다. 처음으로 사탕수수에서 사탕을 추출한 것은 1802년의 일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 농업으로 개발한 것은 1830년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1867년 하와이의 왕국 이 미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함으로서 하와이의 산물이 미국본토에 면세로 통과하게 되었다.

그 후 하와이 사탕농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경제의 으뜸이 되었다. 사탕수수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은 전적으로 외국에서 불러들인 인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1852년 처음으로 중국에서 대량의 노동자를 수입하였고, 그래도 모자라서 포르투갈 일본에서 노동자를 불러 들였왔다.
1896년 11월 2일 하와이 정부는 한국에서도 노동자를 불러오는 문제를 토의 한 후에 정식으로 이를 승인했다.
1902년 사탕수수농주협회는 데슐러를 한국에 보냈다. 이러한 사정을 안 고종황제는 하와이 이민이 결실을 보도록 허락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의 배경은 여러 가지를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가난때문 이다. 한말에 한국인이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를 못했다. 그러나 1902년 겨울 심한 기근에다 흉년이 여러해 계속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는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쌀을 외국에서 들여와야 했던 조정의 관리들도 미국이민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갖게 되었다.
둘째로 고종황제는 중국인도 가기 힘든 미국으로 한국인이 이민을 갈수 있다는 데에 상당히 고무되었다.

고종은 오늘의 외교통상부 여권과 같은 수민원의 설립을 결심했고, 수민원은 동서 개발회사와 함께 서울, 부산, 인천, 원산등지에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선발을 위한 광고를 냈다. 이렇게 해서 각지에서 응모한 이들중 121명이 선발되었고,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를 향해서 첫 이민선이 떠나게 되었다. 이들을 전송하기 위해서 경인 기차편으로 민영환 수민원 총재등 조정관리들이 직접 제물포, 오늘의 인천부두로 나왔다. 바다건너 낯선땅으로 떠나는 이민자들은 고향을 등지는 아쉬움속에 눈물을 흘리며 친척들과 기약없는 작별을 했다. 첫 이민선이 떠난 날인 12월 22일은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날, 인천 부두에는 세찬 눈바람이 불어와 가뜩이나 긴장되고 서러워 하는 이민자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제 1진은 대부분이 기독교 인이었고 50여명의 남녀와 20여명의 부두노동자등 다양한 계층이었다.
첫 이민자를 모집한 동서개발 회사는 이민자들에게 뱃삯과 지참금조로 일정한 돈을 주었다.

하와이 첫 노동자들은 수민원 민영환 총제가 발급한 20여명이 병이 있는것으로 밝혀져 뒤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102명이 통역과 함께 미국 상선 S.S. Gaelic 호로 갈아타고 호놀루루까지 1 만리나 되는 뱃길에 올랐다.
2. 1903 년 1월23일 첫 이민선 도착
초기이민의 첫 배가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한 날짜는 1903년 1월 13일 아침, 갤릭호가 태평야상의 낙원이라는 호놀루루에 닻을 내렸다.
첫 이민자들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단발을 한 이들도 있었고 상투를 그대로 틀고 온 이도 있었다. 상투를 자르지 않고 온 이들은 하외이 에서 돈만 벌면 즉시 한국 고향땅으로 귀국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역 이민을 생각하고 온 이들도 있었다. 첫 배로 도착한 이민자는 오하후섬 와일루아 농장 목굴리아 동네에 가서 사탕수수 재배 등 중 노동에 종사했다. 1903년 한해동안 모두 16차례의 선편에 1,133명이 왔고 1904년에는 33차례의 선편에 3,434명, 그리고 1905년 7월초 까지 16차례의 선편에 2,659명이 도착하는 등 모두 7,226명의 '이름없는 선구자'들이 태평양상의 낙원, 꿈의 나라라고 불리는 하와이에 속속 도착 했다.
또 다른 기록에는 65척의 선편에 7,026명, 이중에 부녀자가 755명이라고 나오는 곳도 있다.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이라지만 모두 7천여명의 선구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했고 문화와 말, 음식이 다른 새땅에서 기약없는 이민생활을 하면서 한국인의 뿌리를 내려갔다.

이와 때를 같이한 또 하나의 슬픈 한국의 이민자 그룹이 있다. 바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와 훗날 큐바 하바나 까지 뻗어간 초기이민의 한 흐름을 이룬 이들이다. 멕시코 이민은 영국인과 일본인의 농간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한 비참한 노동이민이 었다.
1905년 3월 6일 멕시코 이민선이 제물포를 떠났는데 남자가 802면 여자와 아이가 231 명 등 모두 1,033명 이었다. 그들은 유가탄 메리다 지방 어저귀 농장에서 일을 했고, 4년 계약 만료 후에야 멕시코 내의 타지역으로 이주할 수가 있었다. 큐바이민은 멕시코 노동자 중에서 또다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큐바로 떠난것이다. 이들은 1921년 1월 9일 288명이 큐바 맛나치에 도착, 농장에서 다시 새 생활을 시작했다. 멕시코와 큐바 이민자는 출발 때 각오했던 미주와 조국땅에 가보려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중남미에서 어느 하늘아래서 '잊혀진 종족 ' 처럼 대를 이어가고 있다.
3. 초기 단체를 조직하고 자녀교육에 헌신
한인들은 미주에 도착한 후 곧바로 사회단체를 만들면서 활동해 나갔다. 친목을 목적으로 혹은 상부상조나 교육장려 그리고 국권회복운동을 위해서 정치적인 활동을 펴 나갔다. 단체가 지향해 나가는 이념은 민주주의 였고, 그 제도는 민주적인 방식이라는데에 특징이 있다. 물론 난립과 분파활동 등 처음부터 시련에 직면하기도 했다.

초기 이민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단체로는 '대한인국민회'를 손 꼽을수 있다. 그리고 흥사단, 대한여자애국단, 동지회, 하와이대한 부인회가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이중 국민회, 흥사단, 여자애국단은 도산 안창호를 지도자로, 그리고 동지회는 우남 이승만의 독립노선을 따랐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903년 9월 23일 도산 안창호의 지도와 이대위, 박성겸, 김성무, 장경 등 발기로 '한인친목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첫 미주단체였다. 하와이 호놀룰루 에서는 1903년 8월 7일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등의 발기로 신민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정치적 단체였다. 그 목적은 구국정신을 고취하여 일본의 침략행동에 저항하는 동족단결 국정쇄신이며 회장은 홍승하였다.

대한민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재미 한인이 굳게 뭉쳐 조국광복 운동의 목표를 세운뒤 미주, 하와이, 멕시토, 원동 등에도 지방총회를 결성했다. 국민회의 창립은 재미한인단체의 통일인데 처음에는 하와이 지방 총회와 북미 지방총회로 존재하다가 1912년 중앙총회를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하게 된것이다. 총 회장은 정재관, 최정익, 황사용, 문양목, 이대위, 임정구, 강영소, 최진하, 강영승, 백일규, 김호, 한시대등 큰 인물이 맡았다.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는 1921년 하와이 지방총회로, 1922년 3월부터 1932년 2월까지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했다.
'동지회'는 이승만 박사가 1921년 7월 21일 하와이에서 창립했는데 상해 임시정부 지원과 미국내에서의 외교활동등을 목표로 했다. 동지회 북미총회가 1929년 12월 로스엔젤리스에서도 구성되었는데 하와이 중앙부의 이사원은 김영기, 민찬호, 김노디, 곽대홍, 윤치영, 김선기였고 로스엔젤리스 북미총회는 이살음, 송철, 박호근, 안상학 등이 중심인물 이었다. '흥사단은 재미한인의 인제양성을 목표로 1913년 5월 13일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했다.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단우들은 대한인국민회의 퓜ジ?대행하고 국민회 회원 자격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역대 이사장은 안창호, 송종익, 곽림대, 김성권, 이암, 한시대 등이었다. 흥사단은 오늘날 미주와 한국내에서 90년의 여사를 가진 단체로 더욱 성장해 나가고 있다.

'대한인 여자애국단' 은 3.1운동이 일어난후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1919년 8월 2일 중가주 다뉴버에서 긱 지녁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목적으로는 1. 조구독립운동에 관하여서는 대한인국민회와 협력하고 2. 가정의 일용 사물을 절약하여 독립운동 후원금을 내며 국내 동포의 구제사업에 노력하고 3. 가정에서 일본 물품을 배척하는것등이었다. 당시 1시간에 15센트의 품삭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에 이들 한인 부녀자들은 가정보다 조국을 위해서 매월 3달어씩의 회비를 냈다. 이돈으로 상해임시정부, 워싱턴 구미 외교부, 신한민보 등에 후원금을 냈다. 총 부단장은 김혜원, 한성신, 강원신, 황보석, 양제현, 임메불, 이혜련, 박경신, 이화목 등이었다.
'하와이 대한부인 구제회'는 1919년 4월1일 설립, 조국광복운동을 위하여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외교선전사업에 후원금을 냈고 군사활동을 위하여 만주에 있던 대한군정서와 대한 독립군 총 사령부에도 후원금을 냈다.
4. 민족지도자 따라 40년간 독립운동
구한말 뜻을 세운 민족의 지도자들이 새 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속속 도착을 했다. 특히 나라 빼앗긴 1910년 후에는 정치적 망명을 위해서 미국을 찾는 선구자들이 늘어났다.
우학 및 정치적 망명을 온 초기 인물로는 도산 안창호(1902년 미국도착), 우남 이승만 (1904년) 그리고 우성 박용만을 들 수 있다. 이들보다 앞서 1885년에는 용제 서재필이 미국에 왔다. 비록 몸만은 이역만리 미주땅에 와서 살고 있지만, 민족의 큰 지도자들은 자나깨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마음뿐이었다. 하와이와 미주의 초기 개척자들은 이승만의 외교노선, 박용만의 군사노선, 안창호의 민족계몽운동을 따라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애국 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 등에 지원하는 일을 너나없이 참여를 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온 초기 이민자들은 1905년 1945년까지 약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미주 땅에 민족의 지도자를 지원하고 애국 금을 모으는 일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정했다. 미주지역에서 처음 독립운동의 햇불을 높이든 애국자는 바로 장익환, 전명운 의사였다. 이 두 독립지사는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외교고문 더함 스티븐즈를 저격했는데 이로부터 미주의 독립운동이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그 후 3.1운동을 전후해서 독립운동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는데 특별히 이 시기부터 군사활동, 외교활동이 눈에 뜨인다.
조국광복의 밑걸음이된 이들은 바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참여한 초기 이민자들이었다. 미주지사 80여명이 광복 후 오늘까지 독립지사로 표창을 받았는데 독립운동사 발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5. 미주이민 100주년 맞이하다.
1945년 8월 15일, 초기 이민자들은 미국땅에서 민족해방의 기쁨을 맞이했다.
조국이 일제 36년의 질곡에서 벗어났고, 한국은 독립국가로 새롭게 태어났다. 조국에는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가 역 이민으로 환국했고, 건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2차 대전 동안 미주에 사는 초기이민 1세들은 전쟁승리를 위해 적극 미국을 지원했고, 한국이 독립되기를 자나깨나 기원했다. 또한 초기이민 2세들은 직접 미국으로 유럽전선으로 나가서 태어난 나라 아메리카를 위해 싸웠다. 광복과 건국부터 1950년에 이르기 까지 미주한인사회는 유학생. 입양아. 국제 결혼한 한국여성들이 새 이민자로 늘어났다. 1965년 10월 3일, 존슨 대통령은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역사적인 새 이민법에 서명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제안하고 존슨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통과시킨 바로 이 '개정이민법' (The 1965 Amendments) 이 한국인의 가족 이민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아일랜드 계의 카톨릭신자였던 케네디 대통령은 당선이 되자마자 과거 미국 이민법에 차별적인 무제가 있음을 알고 역사적인 수정작업에 나섰고 이를 이루어 냈다.

'개정이민법' 은 케네디 이민법 또는 하트 셀라 법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인이 미국을 향한 대량이민의 새 분수령이 된 '개정이민법' 때문에 매년 2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올 수가 있었고 한국사회에서 미국이민의 새 역사를 만들어 냈다. '개정이민법' 이 실질적으로 유효하게 되고 이용하게 된 것은 3년 후인 1968년 부터였다. 이때부터 미국에 이민 폭발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이민이 몰려들어온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는 한국인 이민자들이 개정 새 이민법에 따라 물밀듯이 미국땅에 들어왔고 오늘 아메리칸 드림을 활짝 꽃피워가고 있다. 그리고 2세 3세로 뻗어나가고 있다.
2003년 1월 13일이면 한국인의 미주이민은 100주년을 맞이한다 이를 위해서 하와이, 로스엔젤리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에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 회가 구성되어 역사정리와 새로운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